타가메 겐고로(田亀源五郎) 인터뷰
: 위계적 남성성의 탐구에서 보편적 인간 욕망의 세계로
일본 동성애 만화의 거장이 말하는 에로티시즘과 남성성
_ 창작의 철학과 미학
Q1. 작품의 미학적 방향성에 대해: 선생님의 작품들은 근육질의 남성 신체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관능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거친 남성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육중한 몸과 노골적인 성애 묘사가 두드러지는데요. 이러한 남성 신체 표현에 담긴 미학적 논리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작가로서 추구해온 에로틱 아트의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나는 내가 그리는 모티프를 이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가 아름답거나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을 그립니다. 남성의 육체나 노골적인 성애 묘사도, 내가 그리는 것은 모두 내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특히 내가 무엇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가는, 결코 타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나 자신만의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나와 같은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를 동성애자라고 자각하게 되었지만, 세상의 대다수가 이성과 성적 매력을 느끼는 이성애자이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더라도(적어도 내가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까지 지내던 시기에는 그런 분위기였고, 동성애는 비정상으로 간주됐다), 그 사실이 나를 이성애자로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성적 지향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내게 예술이란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만의 절대적 기준인 성적 매력을 느끼는 모티프를 그리는 것은, 나의 예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순수한 창작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2. 스토리텔링과 에로티시즘: 선생님의 만화는 단순한 예술적 포르노그라피를 넘어 서사적 깊이와 감정/정동의 역동성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권력 관계의 역전이나 자기 발견과 같은 셰익스피어적인 서사가 성애적 장면/세팅과 교차하며 전개되곤 합니다. 이러한 내러티브 구조를 구성하실 때 어떤 원칙이나 접근법을 갖고 계신가요? 에로틱한 요소와 이야기를 조화롭게 엮어낼 때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을 듣고 싶습니다.
A. 스토리텔링에 관해 정해진 방법론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르노그라피, 특히 장편을 그릴 때에는 에로틱한 요소를 단순한 ‘부록’으로 만들지 않도록 신경 씁니다. 에로틱한 장면을 빼도 성립하는 이야기라면, 그것은 내가 그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행위나 성적인 상황을 통해 캐릭터의 심정이나 입장이 변화하고, 그것이 이야기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며, 그것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것—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Q3. 위대한 만화가들을 보면, 작품의 구상을 ‘주요 캐릭터들의 설정’으로 시작하는 타입이 있고, ‘서사/드라마의 설정’으로 시작하는 타입이 있습니다. 타가메 겐고로 선생님은 어느 쪽이신지 궁금합니다.
A. ‘주요 캐릭터 설정’보다 ‘이야기·드라마의 설정’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구체적인 캐릭터를 정하고 그 캐릭터를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하기보다, 먼저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고, 그다음에 그 사건에 알맞은 캐릭터를 구상합니다.
Q4. 다양한 장르와 페티시의 활용: 선생님 작품의 에로틱한 테마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가죽 컬처, 군복이나 유도복 등 남성적 아이콘, BDSM적 설정은 물론이고 SF 혹은 판타지 또는 역사극의 요소까지 도입해 새로운 차원의 성애적 세계를 그려내곤 합니다. 이렇게 여러 장르와 소재를 에로티시즘과 결합시킴으로써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현실이 아닌 과거 시대나 환상의 무대를 자주 배경으로 택하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때로는 일종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독해되기도 합니다.
A. 나는 포르노그라피의 큰 무기 중 하나는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꿈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소설이나 만화 같은 내러티브 포르노그라피와, 현실의 성행위를 기록하는 성인 비디오와의 큰 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그려진 꿈’과 현실의 독자 사이의 거리는 작품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며, SF나 시대극처럼 현실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표현할 수 있는 꿈도 더욱 대담하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Q5. 예술과 포르노의 경계: 선생님의 작품이 지닌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노골적 성 표현과 폭력성 때문에 흔히 포르노그래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선생님께서는 “에로틱 만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인간을 묘사하고 싶었다”라는 취지로 말씀하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예술 대(VS) 포르노의 경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계신가요? 대담한 성적 표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메시지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있다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예술과 포르노는 대립하거나 경계선을 그을 대상이 아니라,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술이면서 동시에 포르노인 작품의 존재는 내게 아무런 모순이 없어요. 나는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평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에게 예술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겠죠. 사회가 그것을 예술로 규정하느냐 여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설령 세간에서 수억의 가치를 매기는 예술 작품이라 해도, 내게 전혀 미적 가치가 없는 경우도 흔합니다.
Q6. 시각적 디테일과 육체성 표현: 작품에서 남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섬세한 디테일은 독보적입니다. 수염과 체모까지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그려내어, 독자로 하여금 살갗의 질감이나 무게감까지 상상사도록 합니다. 이렇게 촉각적인 현실감 혹은 핍진성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기법과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가요? 리얼하다는 것이, 꼭 하이퍼리얼한 묘사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에로틱 아트에서 인체의 물리적 존재감을 강조하는 방식은, 대상의 자연주의적 재현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떠한 선을 머릿속에서 그리며 자신만의 현실감 혹은 핍진성을 구현하고 또 유지해나가는지 알고 싶습니다. 타가메 겐고로의 머니샷 장면들이라고 하면, 성애/성욕이 아주 리얼하게 그려지지만, 그 제시 방식이 매우 아름답게 제례화/양식화됨으로써, 즉 사실상 아주 비천하고 언캐니한 단계로는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어떤 깔끔한 감칠맛(일종의 우마미?)을 유지해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A.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을 파고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됐습니다. 사실적 리얼리즘과 양식화·기호 표현의 균형은 나 나름대로 고민하며 그리지만, 결국은 내가 좋다고 느끼는가 여부로 귀결됩니다. 육체와 성의 생생함이 있으면서도 그림으로서 아름다운 결과, 그것이 나의 이상이죠.
Q7. 극단적 남성성과 권력의 역전: 선생님 작품 속 인물들은 흔히 과장된 하이퍼-마스큘린한(초남성적) 특징을 지닙니다. 거대한 근육질 몸, 울퉁불퉁한 턱과 털로 뒤덮인 몸 등 전형적 ‘남자의 상징’을 갖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죠.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남성성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들이, 운명적 이야기를 통해 때로는 굴복당하고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또 변화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극단적 남성성을 즐겨 다루시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강한 남성성의 취약한 측면이야말로 가장 남성적인 면모’라는 아이러니를 아름답게 포착해내는 자신의 능력은, 언제/어떻게 발견하셨나요? ‘누가 진짜 강한 남자인가’에 대한 메시지나 문제의식을 탐구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깨달음에 도달한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A. 이는 나의 SM적 취향에서 비롯합니다. 남성성이 파괴되는 데서 에로스를 느끼기 때문이며, 그것이 곧 나의 성적 지향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부터 근육질이거나 수염이 난 성인 남성을 좋아했고, 영화나 TV에서 그런 사람들이 묶이거나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면 두근거렸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직접 그리다 보니, 주인공이 자신의 남성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이 전복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남성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비극을 심화시킨다는 구조에 내가 강하게 성적으로 매혹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동시에 그것이,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호모포비아를 극복할 수 있는가와도 닮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기 수용은 나의 큰 주제가 됐고, 남성성 집착으로 파멸하는 이야기뿐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얻는 이야기, 혹은 다층적인 아이러니가 담긴 이야기 등 다양한 유형을 그리게 됐습니다.
Q8. 호모소셜리티에서 호모섹슈얼리티로: 선생님의 많은 작품에서, 처음에는 이성애 규범 속에 있거나 거칠고 이른바 ‘남자다운’ 인물들이 동성 간 관계를 통해 숨겨진 욕망을 자각하게 되는 전개가 두드러집니다. 즉, 남자들만의 폐쇄적 세계(호모소셜한 환경)가 어느 순간 동성애적 긴장으로 전환되는 지점들이 인상적인데요. 이런 이야기를 자주 그리시는 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나요? 남성 집단 내부의 숨은 동성애 에너지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남성성의 허위를 폭로한다거나, 성적 지향의 유동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등 특별한 메타-주제가 초기에서부터 존재했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A. SM 맥락에서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피학적 상황에 놓이는 쪽이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보다 대비가 강하고, 나에게 매력적인 구도가 됩니다. 또한 호모소셜한 세계에 동성애적 꿈을 투영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존재한 게이 포르노의 고전적인 소재입니다. 특별히 메타적인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호모소셜이 아무런 긴장이나 반발 없이 호모섹슈얼로 전환되는 ‘순진함’이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포르노로서는 달콤한 꿈일 수 있지만, 내 감각에는 부족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 작품에서는 호모소셜리티와 호모섹슈얼리티의 대립과 그 사이에 생기는 긴장감 등을 더 깊게 그리게 됐습니다.
Q9. 예술사적 영향과 전통의 활용: 선생님의 작품에는 현대/동시대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 전통과 맥이 닿아있는 요소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서양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나 미켈란젤로의 누드와 수난 묘사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말씀이나, 일본 에도 시대 슝가(春畫) 등의 전통적 에로틱 아트에서 폭력 묘사의 미학/미감을 참고하셨다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마르키 드 사드, 츠키오카 요시토시, 미시마 유키오, 후나야마 산시, 오다 토시미, 마루오 스에히로, 하나와 가즈이치, 히라구치 히로미, 빌 워드 등의 이름을 들고 있다.) 이러한 미술사적 영향들을 보면, 어릴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은 클래식 음악과 소위 고급 예술을 중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적에 실견을 통해 뇌리에 각인된 작품이 있나요?
A. 부모님이 예술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집에 있던 서양화 화집을 자주 봤죠. 고대 그리스 조각이나 르네상스, 바로크 회화에는 수염 난 남성의 탄탄한 나체가 넘쳐났고, 기독교 회화에는 십자가형이나 채찍질 같은 SM적 모티프가 많아, 그런 것을 보는 것을 무척 좋아했어요. 군상 <라오콘>, 파르테논의 <헤라클레스>,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채찍질>, 루벤스의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등이 특히 인상에 남았어요.
Q10. 독자층에 따른 표현의 변화: 선생님의 작품은 핵심 독자층인 게이 남성뿐 아니라 여성 및 이성애자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뷰에서 “게이 남성 잡지에 연재할 때는 주인공의 주도성과 내면에 집중하지만, 여성 독자도 볼 작품이라면 관계성이나 커플링에 더 신경쓴다”는 식으로, 독자 집단에 따라 연출을 조절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다양한 독자를 상대할 때 스토리텔링이나 그림체에서 어떻게 변화를 주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게이 남성들이 선호하는 캐릭터와 이성애자 여성 독자들이 선호하는 캐릭터의 구현 방식이나 발화 방식 등은 크게 다를 것 같은데요. 어떻게 꽤 넓은 교집합을 성공적으로 찾아내시는지 늘 경탄스럽습니다.
A. 기본적으로는 먼저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 있고, 그중에서 게재 매체에 어울릴 만한 것을 골라 묘사 등을 조정합니다. 다만 매체의 특성에 맞추기 위해 내 표현을 꺾는 일은 없어요. 양쪽 사이에서 적절한 접점을 찾는다는 느낌이에요.
_ 성장 과정과 정체성 형성
Q11. 어린 시절과 예술적 성장 배경: 이제 조금 개인적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964년 2월 3일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가문이 사무라이 후손이라는 소개도 접한 바 있습니다. 형이 한 명 있죠? 몇 살 차이인가요?
어린 시절에는 어떤 환경에서 자라셨고, 미술이나 만화와는 어떻게 접하게 됐나요? (유치원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초등학교 3학년에 유화를 배우기 시작했다고요?) 어릴 적 집안 분위기는 매우 보수적이었고, 기본적으로 만화나 대중문화는 금지된 환경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만화를 읽는 것은 금지됐으나, 유일하게 허용된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이었다고요. (데즈카 작품이 허용된 이유는 부모님이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정서교육에 적합한 양서”로 생각했기 때문이이라고 들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나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만화를 그리고 있었고,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일찍부터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데즈카 오사무 외로도 롤모델이 있었나요?
비고:
_ 타가메 겐고로가 꼽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01. <도로로(どろろ)>: 어린 시절 TV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했고, 강렬한 공포와 판타지 요소에 큰 인상을 받았다. 어릴 적 친구와 함께 <도로로>의 결말을 직접 그려보려 했던 일화도 있으며, 이 작품의 하드한 세계관에 깊이 매료됐다고 한다.
_ 타가메 겐고로가 꼽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02. <기리히토 찬가(きりひと讃歌)>: 데즈카의 작품 중 특히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표현이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강렬한 묘사 방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_ 타가메 겐고로가 꼽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03. <인간곤충기(人間昆虫記)>: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적 갈등과 잔혹한 사회 현실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표현 기법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_ 타가메 겐고로가 꼽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04. <MW(뮤)>: 동성애적 요소를 포함한 이 작품은 타가메가 게이 작가로서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작품이라고. (다만, 타가메는 이 작품에서 표현된 동성애의 모습이 현실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느꼈고, 젠더와 성정체성의 혼란을 다룬 측면이 동성애적 맥락을 희석했다고 평가했다.)
_ 타가메 겐고로가 꼽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05. <슈마리(シュマリ)>: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중, 남성 간의 긴밀한 우정이나 동성애적 긴장을 암시하는 관계의 면에서 흥미롭게 읽었다고 말했다. <슈마리>의 주인공 슈마리와 주베이(十兵衛)의 관계, 즉 두 남성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내적 유대에 깊이 공감했다고 밝힌 바 있다.
_ 타가메 겐고로가 꼽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06. <刑事もどき(형사 모도키)>: 두 남성 주인공의 관계성과 남성적 매력이 타가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타가메는 이 작품을 자신이 직접 리메이크해 재창작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A. 부모님의 일 때문에 유년기에 몇 번 이사를 했고, 안정된 곳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대학 졸업까지를 보낸 가마쿠라였어요.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세 살 위의 형과 나, 이렇게 4명이었습니다. 여름이면 도쿄에 살던 아버지 쪽 조부모가 피서를 오셨고, 할아버지 사후에는 할머니가 함께 살았습니다.
부모님의 교육 방침은 보수적이었고, 정서 교육을 중시했지만, 아이에게 주는 것은 고상한 예술 작품뿐이라는 생각이었어요. 만화, 애니메이션, 가요 같은 대중문화는 금지였고, 예외는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뿐이었습니다. 덕분에 어린 시절에는 다른 만화에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점차 학교 친구들에게 빌려 읽게 됐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직접 만화를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때 ‘뉴웨이브’라 불린 만화를 접하고 나서였습니다. 히사우치 미치오(久内道夫, 1951-), 미야니시 케이조(宮西計三, 1956-), 오토모 가츠히로(大友克洋, 1954-) 같은 작가들이었는데, 그들은 내가 알던 만화와 전혀 다른 스타일로, 히사우치와 미야니시는 그 그림으로 에로틱한 성인용 만화를 그리고, 그 안에 남성 동성애 이야기도 있었어요. 그것을 보고 나도 그려보고 싶다는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의 에로틱 코믹 작가 귀도 크레팍스(Guido Crepax), 성인용 SF·판타지 코믹을 그린 에스테반 마로토(Esteban Maroto), 페르난도 페르난데스(Fernando Fernández), 호세 곤살레스(José “Pepe” González) 등의 작품을 접하며, 일본 만화와는 전혀 다른 회화성이 높은 그림에 매료됐고, 내러티브가 있는 만화를 높은 일러스트 품질로 그리는 것에 대한 동경이 생겼습니다.
Q12. 데뷔와 BL 잡지 활동: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982년에 여성 대상 BL잡지(여성향의 탐미계 소년애 잡지) <소설JUNE(小説JUNE)>에 작품을 투고하며 프로 만화가로 데뷔했습니다. (비고: 정식 작품 목록에는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아들과 아버지 간의 근친상간과 살인을 그린 내용이었다고요? 투고 계기가 있었나요?
<JUNE>은 나름 사회파적인 스토리와 실험성으로 유명했다는데, 그곳에서 작업한 것이 선생님의 예술관에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시 BL 매거진의 발행부수가 상당했던 것으로 압니다. 데뷔작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후죠시들의 BL물과, 게이 창작자의 BL물 사이엔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앞서 말한 영향으로 고등학생 때 그린 만화가, 후에 <소설 JUNE>에 실리게 됐습니다. 당시 좋아했던 히사우치 미치오의 스타일과, 1920년대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록웰 켄트(Rockwell Kent)의 화풍을 결합한 작품이었어요. 내용은, 아버지 몰래 남자를 상대로 매춘하던 소년이 발각돼 아버지에게 공격을 당하고, 그 소년에 빠져 있던 손님 남성이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였습니다. 남성 동성애판 팜 파탈 같은 내용이었죠. 미숙했고 필명도 달랐기에 ‘타가메 겐고로’ 작품 목록에서는 제외했습니다.
잡지에 게재된 계기는, 미대 진학 후 만화가 지망 친구가 생겨, 나도 예전에 만화를 그려본 적 있다고 보여줬더니, <JUNE>에 투고하라고 권유받았기 때문이었어요. 권유대로 보냈더니 게재됐구요. <JUNE>은 현재의 BL과 달리 ‘탐미’를 중심 주제로 다양한 지면을 가진 잡지였습니다. 다케미야 게이코(竹宮惠子, 1950-) 같은 소녀만화 거장부터, 히사우치 미치오(久内道夫, 1951-)·하나와 카즈이치(花輪和一, 1947-) 같은 ‘가로(ガロ)’계(대안만화계) 작가, 다카노 후미코(高野文子, 1957-) 같은 뉴웨이브 계 작가 등 다양한 작품이 섞여 있었어요. 그 일부가 후에 BL 장르로 이어졌지만, 내가 투고한 것은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가로계(ガロ系): 1964년부터 2002년까지 청림당/세이린도(青林堂)에서 발행한 전설적인 만화잡지 <월간만화 가로(月刊漫画ガロ)>에 게재됐던 언더그라운드 만화작품이나 그 작가들의 작풍을 가리키는 용어. 일본의 얼터너티브 코믹에 해당하며, 기존 상업만화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표현을 추구했다고 평가된다.)
Q13. 정체성 형성과 커밍아웃 경험: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정체화/사회화 과정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자신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자각의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유치원생 때 이미 소풍에서 남아용 장남감총 선물 대신 여아용 소꿉놀이 세트를 받은 뒤,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 내가 남과 참 많이 다르구나 깨달았거든요.)
게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자각하게 된 시점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고요. 이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어 서점에서 관련 책을 찾았다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의 <털없는 원숭이(The Naked Ape)>(1967) 같은 책을 통해 동성애가 자연의 일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큰 위안을 얻었고, 알 파치노의 영화 <크루징(Cruising)>(1980) 같은 서구의 미디어 컨텐츠에서 게이 문화를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하위 문화를 형성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됐다구요.
A. 앞서 말했듯, 어린 시절부터 TV나 영화에서 탄탄한 성인 남성의 반라나, 묶이거나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십계>, <벤허>, <혹성탈출>의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 그리고 조니 와이즈뮐러(Johnny Weissmuller)·론 엘리(Ron Ely)가 연기한 타잔 등이 그랬죠. 남성과 SM 양쪽에 끌린다는 점이 성적 자각에 혼란을 줬습니다. 13살 무렵,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소돔의 120일(Salò o le 120 giornate di Sodoma)>(1975) 광고를 통해 사드의 <소돔 120일(Les Cent Vingt Journées de Sodome ou l'École du libertinage)>(1785), <악덕의 번영(l'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1797-1801)을 알게 됐고, 열독하며 SM 세계를 알게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점에서 게이 잡지 <사부(さぶ, Sabu)>를 발견해 게이 세계도 알게 됐죠. 하지만 당시 게이 잡지 모델은 매력이 없었고, 이성애자 대상 SM 잡지에서 남성 모델이 묶이거나 당하는 사진을 보면 게이 잡지를 볼 때보다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한때 나는 게이가 아니라 마조히스트 남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남학생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자신이 게이라는 명확한 자각에 이르렀습니다.
Q14. 청춘기의 커밍아웃 경험: 18세가 되던 1982년 고등학교 졸업 무렵 처음으로 좋아하던 친구에게 게이라고 커밍아웃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나요? 결과적으로 그 친구와는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이를 통해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법을 배웠다고요... 작가로 성공한 뒤, 그 친구와 재회한 적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부모님은 아들이 도쿄대학에 진학하여 은행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다마미술대학에 진학해 그래픽디자인을 배웠다고요. 대학 입학과 함께 주변에 커밍아웃하고, 직장에서도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지 않고 오픈리 게이로 살았습니다. 에이즈 대위기의 시대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버블 시대니까 가능하기도 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이러한 커밍아웃 경험은 이후의 삶과 예술관 형성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을 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에게 커밍아웃하고, 군대를 제대한 1993년 동성애자인권운동과 문화운동을 상상하고, 1994년 주변에 완전히 커밍아웃하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특히 운동권의 옛 동료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새로운 친구들을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서울대학교 본부의 교수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제적이 논의되는 등 사회적 제약과 차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982년경 처음 <사부>라는 잡지를 발견하고 열어본 순간, 나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어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잡지는 ‘내가 비로소 나의 존재를 인정받는 공간을 처음으로 찾아낸 곳’이었다고요.
(비고: <사부(さぶ, Sabu)>는 1974년 11월에 창간된 일본 최초의 본격 성인 게이 잡지로, 이토 분가쿠(伊藤文學)가 발행했다. 일본의 최초 본격 게이 잡지였던 <바라조쿠(薔薇族)>(1971년 창간)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창간된 게이 대상 잡지였지만, <바라조쿠>가 이성애자에 의해 창간됐던 점을 고려하면 본격 게이 주도라는 차별성이 있었다. <바라조쿠>가 비교적 부드러운 소년미를 강조했다면, <사부>는 근육질 성인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표방하며 하드코어한 게이 에로티시즘과 BDSM 테마 등을 적극적으로 다뤘다. <사부>는 2002년 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했지만, 동아시아 게이 문화 공통의 어법으로 남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동성애자 문화의 발달이 미미했던 1995년 이전까지, 혹은 PC통신과 인터넷의 게이 공동체가 탄생하는 1996-2000년 시기까지도, <바라조쿠>나 <사부> 같은 일본의 게이 잡지들은 한국에서도 적잖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A. 고등학교에서 친구를 사랑하게 돼 게이라는 자각을 했지만, 3년간 고백하지 못했어요. 졸업을 계기로 마음을 전하려 한 것은, 이 모호함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서였습니다. 동시에 졸업 후에는 서로 다른 길을 가니, 혹시 나쁜 결과가 나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도 있었구요. 결과는 “친구로서는 좋지만, 그런 눈으로는 못 보겠다”는, 해피도 배드도 아닌 답이었습니다. 이후 현재까지도 그는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 경험으로 대학에 진학하면서는 오픈리 게이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부터 게이임을 밝히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도 바로 말할 수 있고, 고백으로 우정이 깨질 걱정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호모포비아인 사람은 다가오지 않을 것이고, 게이 프렌들리한 친구를 만들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었죠. 이것은 모두 현실이 됐습니다. 대학에서 또 다른 친구를 좋아하게 됐고, 이번엔 바로 고백했지만 또 거절당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지금까지도 좋은 친구입니다.
1982년부터 오픈리 게이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미대(다마 미술대학)라는 환경 덕이 컸습니다. 예술가·디자이너를 지망하는 사람들이라, 남과 다르거나 개성이 있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동경이나 무기가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시대적으로 나 외에 게이를 공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무의식적인 호모포비아나 마이크로어그레션은 있어도, 노골적인 혐오는 전혀 없었습니다.
졸업 후 입사한 대기업(톱판인쇄, 현 톱판홀딩스)에서도 그대로 오픈리 게이로 있었습니다. 전통과 격식을 중시하는 회사였지만, 아트디렉터로 입사한 덕인지 게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적은 없었고, 오히려 ‘게이라 예술 감각이 뛰어날 것’이라는 편견이 유리하게 작용한 경우도 있었어요. 다만, 공무원이나 은행처럼 보수적인 직종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되진 않았겠죠.
_ 게이 만화와 문화적 맥락
Q15. 잡지 <사부>와의 만남 및 첫 투고: 1987년에 처음으로 게이 잡지 <사부>에 투고했습니다. 당시 투고한 작품은 <유술교사(柔術教師, Jūjutsu Kyōshi)>라는 작품이었죠? 이 작품 이후 기고를 이어가며 창작 활동을 지속해왔습니다. (비고: 1994년 단행본 <柔術教師>에 수록되면서 전면개고(全面改稿)돼 복각 출간됐다.) 이 역사적 작품의 오리지널 원화 등 초기작의 원고와 관련 스케치 등을 모두 소장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뮤지엄 소장품이 돼야 할 귀중한 자료니까요.)
1987년부터 타가메 겐고로라는 필명을 사용하신 게 맞나요? 타가메는 물장군을 뜻하고, 겐고로는 물방개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라고 들었습니다. 독특한 필명의 숨은 맥락이 있나요?
소설 창작시에는 기도 고하치(城戸呉八), 기토 다이고(鬼頭大吾)라는 필명도 사용하시는데요, 역시 숨은 뜻이 있을까요?
A. 내 활동 거점을 <사부>로 정한 이유는, 내용이 내 취향에 맞았다는 것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세 게이 잡지 <바라조쿠>, <사부>, <아돈>에 작품을 투고했을 때, 원고료를 준 것은 <사부>뿐이었기 때문이에요. <바라조쿠>는 게재 연락도, 견본지 발송도 없었고, <아돈>은 소설 삽화를 의뢰하고 수정까지 요구했지만 원고료를 주지 않았어요. <사부>는 작품이 실린 견본지, 원고료 수표, 연말에는 원천징수표를 보내주고, 원고도 반환해주는 정상적인 잡지였습니다. 그래서 초기 <사부> 게재 작품 원고 대부분을 잘 소장하고 있습니다.
‘타가메 겐고로’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6년, 첫 게재작은 소설이었습니다. 당시 게이 잡지 필명은 ‘미시마 쓰요시’처럼 남성적이고 멋진 이름이거나, ‘카제 카오루’처럼 로맨틱한 것이 많았어요. 둘 다 내가 쓰기엔 부끄러워서, 남성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수서곤충 이름 두 개를 붙인 ‘타가메 겐고로’를 떠올렸고, 마음에 들어 사용하게 됐습니다. 소설 집필에 쓴 ‘기도 고하치’는,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 에로틱 아티스트 귀도 크레팍스의 이름을 비튼 것이었습니다(귀도→기도, 크레팍스→구레하치→고하치). 또 다른 필명 ‘기토 다이고’는 ‘기도 고하치’의 아나그램이었구요.
Q16. 디자이너에서 잡지 편집장, 그리고 전업 작가로: 대학을 졸업한 직후 일반 회사의 디자인 부서에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습니다. 어떤 회사였나요? 상업 광고나 출판물 디자인 등 가운데에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낮에는 회사에서 광고 일러스트나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면서 밤마다 혼자(조수도 없이) 만화를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1995년 게이 매거진 <지맨(G-men)>을 공동 창간하면서, 편집장직을 맡습니다. (비고: 2006년 <지맨>을 떠남.) 이 시기에 선생님은 상업 디자이너로서의 직장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됩니다. 당시 일본 사회는 1991년의 버블다운 이후, 장기불황의 초입에 놓여있었습니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했던, 그런 위기 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이나 마음이 궁금합니다.
(1994년에 단행본화된 <나부리모노(嬲り者)>가 게이 만화 서적으로서 획기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던 것이 역시 힘이 됐으려나요?)
동료 편집자나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매체를 창간할 당시, 일본의 게이 커뮤니티와 문화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사명감이 있었나요? 1990년대 일본 게이 문화나 게이 아트 신에서 <지맨>이 가졌던 의미와, 그 경험이, 선생님 개인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회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앞서 언급했듯, 나는 톱판인쇄의 크리에이티브 부문 TIC(톱판 아이디어 센터)에 입사해 카탈로그 디자인 등을 했습니다. 이후 톱판인쇄와 네덜란드 필립스의 합작사, 당시 주목받던 뉴미디어 ‘CD-i’ 전용 자회사로 파견돼 콘텐츠 제작 아트디렉션을 담당했어요. 그러나 CD-i는 실물도 없는 상태에서 이론만 존재했고, 내가 원했던 인쇄물 디자인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매체는 1990년대 후반에 사라졌어요.
그래서 몇 년 후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인쇄물 디자인 일을 하면서, 회사 다닐 때처럼 게이 잡지에 작품 발표를 병행했습니다. 그러던 1993년, 새로운 게이 잡지 <바디(Badi)>가 창간됐고, 편집부를 찾아가 보니, <바라조쿠>나 <사부>처럼 이성애자 자본이 아니라, 게이 숍·게이 비디오 제작사 등 게이 자본의 잡지더군요. 또한 기존 게이 잡지가 게이 인권이나 HIV 같은 운동에는 등을 돌렸던 것과 달리, <바디>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당시 나는 기존 게이 잡지가 수익을 회사나 사장의 이익만으로 가져가고, 게이 커뮤니티에는 환원하지 않는 구조에 불만이 컸어요. 그래서 게이 자본의 새로운 잡지 <바디>의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첫 만화 단행본 <노리개>를 B프로덕트(게이 숍 ‘빅짐’·게이 비디오 ‘브롱코 스튜디오’ 운영)에서 출간할 수 있었고,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후 같은 스태프와 1995년 게이 잡지 <지멘>을 창간했어요.
<지멘>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내 작품 발표의 홈그라운드를 만들고, 새로운 게이 작가 발굴과 잊힌 과거 작가 재조명을 통해 일본의 에로틱 게이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에는 어느 정도 만족합니다.
Q17. 학생운동 세대와 게이 출판 문화: 초기 일본의 성인 만화 출판업계에서 활동한 여러 편집자와 출판 관계자 중 상당수는 1960-70년대 일본 학생운동(전공투[Zengakuren] 등) 출신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존 사회 규범과 정치적 억압에 반대했던 경험 때문에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와 하위주체성(subaltern subjectivity) 문제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관심과 연대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정치색이나 노선이 오늘의 일본 게이 하위문화에 남긴 영향이 있다고 보십니까? (한국의 초기 LGBTQ+ 운동가들 가운데 소위 운동권 출신이 많아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A. 학생운동 세대 중에서 게이 인권운동에 공감하고 참여한 사례는 주변에도 몇 있었지만, 그것이 현재의 게이 서브컬처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 협력의 성과로 세상에 나온 책도 있지만, 젊은 세대가 얼마나 친숙하게 받아들이는지는 의문입니다. 또 게이 남성 중에는 자신의 욕망 충족에만 관심이 있고 다른 인권 문제에는 무관심하거나, 사회운동·좌파를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습니다.
Q18. <바라조쿠(薔薇族)>를 창간했던 이토 분가쿠(伊藤文學, 1932년생: 현재 93세!) 선생님의 위상은 독특합니다. “결혼하여 자녀를 뒀지만, 명확한 이성애자라고 하기보다는 양성애적 성향과 개방적 성관념을 지닌 인물입니다...”라고 소개하면, 한국의 청중 여러분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토 분가쿠의 역할과 위상을 어떻게 평가하시나 궁금합니다.
A. 일본 최초의 상업 게이 잡지 <바라조쿠>를 창간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 덕분에 처음으로 게이가 모이는 ‘장소’가 사회적으로 가시화됐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공적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바라조쿠>는 기고 작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한 잡지가 아니었고, 게이 인권운동에도 부정적이었으며, 그의 언행에도 위선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을 새삼 비난할 필요는 없지만, 공적을 과도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Q19. 시대와 역사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작품: <지맨>의 창간과 전업 작가로서 창작한 작품들은,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일종의 더 심오한 사회 저항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장기 불황 시대의 사회 경직화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실천으로 느껴지는 것이죠.
작가님의 작품 세계에는 역사적 맥락을 다룬 것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일본 예술가들은 위기의 시대마다 에도 시대 등 과거를 재해석해 돌파구를 찾는다”고 언급하는 사람도 있는데, 예를 들어 작가님의 작품 <은의 꽃>도 어느 정도 그런 성격일까요? 이러한 전통 재해석으로서의 역사물이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지요?
A. <은의 꽃>의 무대는 메이지 시대이지 에도 시대가 아닙니다. <은의 꽃>은 메이지 시대 유곽을 배경으로, 재산을 탕진하며 여자 유흥을 일삼던 남자가 파산 후 유곽에 팔려 남성을 상대로 매춘을 강요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내 작품 중 에도 시대를 무대로 한 것은 아마 전무하지 않나 합니다. 시대 고증상, 에도 시대 무사는 수염을 기르는 것이 금지돼 있어 내게는 매력이 부족한 시대고, 양성적 요소나 여성혐오를 배경으로 한 에도 시대 남색 문화에도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따라서 “일본 예술가들은 위기의 시대마다 에도 시대를 재해석해 돌파구를 찾는다”는 지적은 내 작품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Q20. SM적 판타지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장편 연재 만화 <외도의 집(外道の家, Gedou no Ie)>(1998-2007)은, 타가메 겐고로 예술의 정수로 꼽힙니다. 국제적으로도 논란이 되며, 동시에 전지구적으로 예술적 평가를 받아냈습니다. 연재 시기는 전지구화 시대의 신자유주의와 함께, 글로벌 네트워크와 시장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즉, 당신에게는 단지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읽고 결단을 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만화가들에게 결여된 감각 혹은 능력이기도 하죠.
(외도의 집은 총 3권으로 구성된 장편 작품으로, 데릴사위가 된 주인공 토라조우가 첫날밤부터 장인어른에 의해 성노리개로 전락하는 이야기다. 2012년 하반기 쯤 타가메 겐고로의 과거 상업지 만화 <크레타의 암소>의 불법 한국어 번역본이 디시인사이드의 몇몇 갤러리에서 떠돌기 시작했고, 이 인기는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타가메 겐고로의 다른 과거 작품들, 즉 장편 작품인 <외도의 집>, <검투사> 등도 불법 유통되기 시작했다. 즉, 2010년대 중반을 거치며 타가메 겐고로 특유의 흡입력과 연출은 한국의 이성애자 독자들 사이에서도 칭송을 받게 됐다.)
A: *미응답
_ 주류 진출과 사회적 변화
Q21. 반면, 2016년 <지맨> 폐간을 전후로 작업 세계가 크게 변화합니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은 타가메 최초의 일반향 만화 <아우의 남편(弟の夫, Otōto no Otto)>(2014-2017)이 이때 나왔죠. 한국의 오타쿠와 후죠시뿐만 아니라, 한국의 일반 독자들도 타가메 겐고로의 예술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동성애자 권리와 가족의 의미를 진지하게 조명했기에,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5년 국제적 동성혼 법제화의 흐름과 함께 공감을 일으킨 문제작이었고, 2018년 NHK 드라마로 제작-방영되는 등 타가메 예술의 사회적 인지도를 전지구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오리구치 료지(折口涼二) 역과 오리구치 야이치(折口弥一) 역은 배우 사토 류타(佐藤隆太)가 1인2역으로 맡았습니다. 한국에서 리메이크된다면, 어떤 배우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A. <아우의 남편>의 반향과 성공은 나 자신도 의외였습니다. 물론 작가로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품을 그리고 있다는 자부심은 있었고, 세계 곳곳에서 동성혼 법제화가 주목받고 있다는 실감이 있었기에, 그 타이밍에 맞춰 발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읽힐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어요.
나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작품의 오락적 측면과 동시에 사회 문제를 담아내는 균형 감각, 그리고 연출·영상미에 감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만약 리메이크된다면 꼭 보고 싶습니다.
Q22. <우리의 색채((僕らの色彩, Bokura no Shikisai)>(2018-2020)는, 정체성을 고민하는 게이 청소년과 중년 게이 남성의 우정과 이해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이 작품 역시 대중 독자층을 포괄하는 일반만화로서 큰 공감을 이끌어내며 시대의 변화와 함께 했습니다. 역시 사회적 책임을 예술로 풀어내는 모습에서, 타가메 겐고로 선생님은 이제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는 청장년이 아니라, 거장의 풍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아시아의 게이 사회가 가져본 적이 없는 어른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단계로의 성장은, <톰오브핀란드>의 저자 토우코 라크소넨(Touko Laaksonen, 1920–1991)도 도달하지/경험하지 못한 일이죠. 거의 모든 걸 이룬 예술가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우의 남편>과 <우리의 색채>를 성공시킨 이후, 예술가로서, 또한 문화운동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어떤 자각에 이르렀을지 알고 싶습니다.
A. 나는 스스로를 거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50세를 넘기면서, 앞으로는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발표하며 내 표현을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전까지 해왔던 ‘일본 게이 문화를 풍부하게 하려는’ 활동은 할 만큼 했고, 성과도 나왔다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죠. 다만 그 결과, 나의 시선이 게이 커뮤니티를 넘어 더 넓은 사회 전체로 향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색채>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소라와 마스터 아메미야 씨의 세이프 스페이스였던 카페가 태풍으로 붕괴하는 장면은, 게이 피플을 향한 나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카페는 신주쿠 니초메 같은 폐쇄적 세이프 스페이스의 은유입니다. 닫힌 공간에서 게이로서의 자신을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일상 사회 속에서도 게이로서 유연하게 살아가자는 메시지에요. 나는 게이 커뮤니티의 매력과 즐거움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때로는 그곳이 무지개 깃발로 장식된 게토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Q23. 창작 활동에서의 어려움과 검열: 오랜 기간 주류 밖에서 활동해오면서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직설적인 섹슈얼리티 표현 때문에 검열을 당한다거나 법적인 제약을 받은 적은 없었나요? 혹은 만화 업계나 사회 일반으로부터 편견이나 반대에 부딪힌 경험이 있나요?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LGBTQ+ 청년 예술가들은,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적 시선을 과의식하며 자기 검열(이른바 커버링)을 실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울러, 작가 생활 동안 일본 사회의 표현의 자유와 LGBTQ+ 예술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도, 직접 체감해오신 바를 듣고 싶습니다.
A. 일본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성기 묘사가 금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해외, 특히 유럽·미국 활동에 적극적인 이유 중 하나도 그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다만 성기 묘사 외에 검열을 받은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편견이나 반발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원래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무슨 말이 나와도 “맘대로 하자”라는 감각이죠.
젊은 LGBTQ+ 예술가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예술가를 목표로 한다면 무조건 자기 자신을 위해 작품을 만들고, 타인의 기준에 맞추지 말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가족이나 전 세계가 적이 되더라도,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편이 돼라” 이 두 가지입니다.
Q24. 주변인의 반응과 지지: 개인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 가족이나 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 선생님의 부모님이나 형제, 가까운 친구들이 선생님의 작품이 게이 에로틱 아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보여준 태도는 어떠했나요? 충격이나 반대는 없었는지, 혹은 반대로 이해와 지지를 받으셨는지요. 현재는 가족분들이나 주변 분들이 선생님의 예술적 성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내 에로틱 아트를 가까운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고, 그것을 알고 거부 반응을 뵈는 사람과는 애초에 친구로 지내지 않았어요. 부모님에게는 성인용 작품은 보지 말라고 못 박아 뒀구요. 부모와 섹스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과 같죠. 그 결과, 부모님은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있고 수입도 명성도 얻고 있으니 됐다”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일반 작품은 평범하게 읽는 것 같습니다. <아우의 남편>으로 몇몇 상을 받았을 때는 매우 기뻐했고, 수상작 전시회에도 “꼭 보고 싶다”며 달려와 주셨습니다.
Q25. 세월에 따른 자기 변화: 게이 예술가로서 수십 년을 활동하시며 선생님 자신의 내적 변화도 많으셨을 듯합니다. 20대 청년 시절의 자아상과 지금을 비교해볼 때, 예술가로서 혹은 한 명의 게이 남성으로서 가장 크게 달라졌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긴 시간 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지속해오며 생각이나 가치관이 변화·성장한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십시오.
A.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변한 것 같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 좋다고 느낀 것을 하는 점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그런 나와 사회의 관계성은 계속 변해오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Q26. 일본 사회의 변화와 LGBTQ+ 수용: 선생님의 커리어와 함께 일본 사회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해왔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에 비해 현재 2020년대의 일본 대중문화나 사회 전반이 게이 예술과 LGBTQ+ 이슈를 바라보는 태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느끼시나요? 한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선생님의 작품의 주류 매체 진출(예를 들면 <아우의 남편>이 NHK에서 드라마화된 일 등)을 직접 목격하시면서, 어떤 역사적 변곡점을 경험하고 있다는 실감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크게 변화했다고 느껴요. 일반 사회에서의 LGBTQ+ 수용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실감합니다. 한편으로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전혀 접한 적 없던 혐오 발언이 익명 뒤에 숨은 채 급격히 늘어났다는 인상도 있죠.
Q27. 해외 독자들과의 교류: 현재 타가메 겐고로 선생님께서는 해외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국제적인 작가이십니다. 영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작품이 번역·출판되고 세계 팬들과 교류하고 계신데요. 다른 문화권의 독자들이 선생님의 작품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흥미로운 점을 직접 발견하거나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일본 독자들과 해외 독자들의 반응에 차이가 있나요?
(한때 불법 번역본이 널리 유포되기도 했었습니다. 작가에겐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또한 그를 통해서 출간되기 어려운 작품이 더 멀리 고립된 청소년에게 가닿기도 합니다. 작가로서 이러한 불법 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몇몇 작품의 컷은 유명한 인터넷 밈이 되기도 했죠?)
A. 사람마다 다릅니다. 국내든 해외든 공통점도, 차이점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큰 특성 차이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해적판 유통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골칫거리에요. 무단 번역판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이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내게 경제적 손실을 주고, 새로운 해외 진출 기회를 막기도 합니다. 다만 내 생계에 치명적 타격이 되지 않는다는 점과, 불법 형태로라도 내 작품을 접할 수밖에 없는 팬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아주 조금 위안을 찾을 뿐입니다.
_ 창작의 원동력과 예술적 메시지
Q28. 창작의 원동력과 궁극적 메시지: 오랜 시간 한결같이 게이 에로틱 아트 창작에 헌신해 오신 원동력은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계속 그리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요? 하루 창작 노동, 식사, 수면 등의 패턴이 궁금합니다. 위대한 창작자들 다수가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는데요...
A. 아마 내가 유난히 색정광이기 때문일 겁니다. 에로틱한 이야기나 그림 아이디어가 부족했던 적은 없어요. 그릴 소재는 끊임없이 떠오릅니다.
일상 습관은 규칙적인 편이 업무 효율이 좋아서 가능한 한 지키려 하지만, 자주 흐트러져 엉망이 됩니다. 다만 파트너와 동거하며 하루 세 끼를 함께 먹는데, 그것이 규칙적인 생활 유지에 약간 도움이 됩니다.
Q29. 타가메 겐고로 예술의 궁극적 메시지: 예술가의 인생을 보면, 수많은 작품을 통해 세상에 던질 수 있는 메시지는 종종 하나인 경우가 많습니다. 타가메 겐고로 예술의 궁극적 메시지 혹은 세상과 함께 나누고 싶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인간은 위계적/관계적 동물이라는 깨달음과 공감일까요?
A. 이런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후대에 누군가가 연구해 주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_ 전후 일본 남성성과 은폐된 게이 예술
Q30. 전후 일본 남성성에 대한 견해: 이제 인터뷰의 초점을 조금 더 넓혀보겠습니다. 패전 이후 일본 사회의 남성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1945년 이후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무사적 남성상이 몰락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남성성 모색이 이루어졌다고들 합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잃어버린 남성 정신을 회복하고자 자신의 육체를 열심히 단련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본의 패전과 미군정 이후 나타난 남성성의 변화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됐다고 보십니까?
A. 패전을 전후로 일본 문화에서 남성성의 이미지는 무사도나 군인 같은 정신적 측면에서, 운동선수나 보디빌딩 같은 육체적 측면으로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편찬한 <일본의 게이 에로틱 아트 vol.1>의 “일본의 게이 에로틱 아트사 개론”과 <vol.2>에 실린 “일본의 게이 에로틱 아트사—게이 판타지의 시대적 변천”에도 자세히 썼습니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자신의 몸을 통해 이 두 가지를 융합하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나 또한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남성상을 즐겨 그립니다.
Q31. 사진작가 야토 타모츠(矢頭保, 1925-1973)에 대해: 전후 일본에서 남성의 육체미를 예술로 포착한 선구자로 사진작가 야토 타모츠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60년대에 야토는 미시마 유키오와 메레디스 웨더비(Meredith Weatherby, メレディス・ウェザビー, 1915-1997)와 협력하며, 일본 남성을 모델로 한 사진집을 다수 남겼습니다. 선생님께서 편찬하신 <일본의 게이 에로틱 아트> 서문에서도, 야토 타모츠와 동세대 예술가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현재 그들의 유산이 잊혀져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신 것으로 압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그런 선구자들의 흐름과 어떻게 연결 짓고 있나요? 게이 예술가들은,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 훼손된 남성성을 억압된 게이 욕망과 중첩지으며, 남성성의 회복을 꾀하고 또 성공시켰습니다. 그 점에서 <톰오브핀랜드>의 예술과 야토 타모츠 예술과 타가메 겐고로 예술에는 분명한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A. 야토 타모츠는 오랫동안 ‘아는 사람만 아는’ 존재였고,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도 결코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접한 것도 작가 활동을 시작한 지 한참 지난 1990년대 중반이었으니까요. 그때 받은 감명으로 인해 내 작품이 야토 타모츠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은 있지만, 작품 제작의 근저에 흐르는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다른 위치의 영향이겠습니다. 내게 근본적인 영향을 준 작가는 10대 후반에 접한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같은 이들이에요.
만약 그 시기에 야토 타모츠의 작품을 만났더라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일반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잊힌 존재가 된 것에 대해 내가 느끼는 문제의식은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에서 게이임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예술가가 적다는 또 다른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구미에는 톰오브핀란드(Tom of Finland)나 밥 마이저(Bob Mizer) 같은 게이 어덜트 업계의 유명 작가들이,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나 브루스 웨버(Bruce Weber)처럼 게이로 커밍아웃한 채 널리 이름을 알린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준 흐름이 있었죠. 하지만, 일본에서는 전혀 볼 수 없어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물밑에서는 미시마 쓰요시(三島剛), 후나야마 산시(船山三四), 오카와 다쓰지(大川辰次) 같은 게이 에로틱 아티스트의 작품을 사랑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고, 공개적으로 칭찬한 것은 누마 쇼조(沼正三)처럼 에로틱하더라도 이성애자 작가와 작품뿐이었습니다. 참고로 내 파트너는 야토 타모츠와 안면이 있었고, 우리 집에 있는 그의 작품집 <OTOKO>는 생일 선물로 받은 것으로, 야토 타모츠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습니다.
Q32. 미시마 유키오의 역할: 전후 일본 남성성 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미시마는 유약한 문학소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사무라이적 이상을 좇는 삶을 실현했으며, 소설 <금색(禁色)> 등에서 동성애를 다루는 등 복합적인 면모를 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미시마의 남성미에 대한 집착이나 미학이 선생님의 예술관과는 어떤 접점 혹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예를 들어, 미시마 유키오가 추구한 전통적 남성성의 회복과 선생님 작품 속 동시대적 남성성은 서로 대립한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모종의 역사적/맥락적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보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앞서 말했듯이, 나는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특히 <오후의 예항(午後の曳航)>(1963)이나 <우국(憂国)>(1961)에 담긴 파괴되는 남성성, 영웅적이면서 나르시시즘적인 마조히즘에는 크게 감명을 받았고, 정신과 육체 양면에서 남성성을 추구하는 접근법에 공감했습니다. <금색(禁色)>(1951/1953)을 발표한 도전 정신이나, 자신의 미학에 따라 선택한 자결 방법에는 두려움과 경외심마저 느낍니다.
그러나 게이로서 살기를 끝내 선택하지 않고, 그것을 모호하게 유지한 태도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결코 존경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처형>을 다른 이름으로 집필했고, 그것이 본인 작품임이 밝혀진 것은 부인의 사망 이후였으며, 그 부인이 미시마 사후에 영화 <우국>의 상영 필름을 소각하거나, 폴 슈레이더의 영화 <MISHIMA>의 일본 개봉을 동성애 묘사를 이유로 방해한 것은, 그가 선택한 존경할 수 없는 삶이 초래한 결과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역사 속에서 동성애나 동성애자의 존재가 지워지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아 왔습니다. 이는 게이 액티비즘 관점에서도 반드시 저항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미시마의 삶은 부분적으로라도 이런 동성애 은폐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비춰집니다.
Q33. 메레디스 웨더비와 문화 교류: 앞서 언급했던 메레디스 웨더비는 일본의 동성애 예술을 해외에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야토 타모츠의 사진집을 서구에 출판하고,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영어로 번역-출간하는 일을 추진하는 등, 일본의 남성 동성애자 문화를 서양에 알리는 데 공헌했죠. 이러한 국제적 교류의 전통은 오늘날 선생님의 작품이 세계 각지에서 읽히는 현상과도 연결된다고 느낍니다. 선생님께서는 일본의 퀴어 아트와 일본 남성의 미학을 세계에 알리는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계신가요?
전전/전후 일본 남성성의 초상을 선생님의 강인한 남성 캐릭터들을 통해 재해석하거나 위로하거나 보완-수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메러디스 웨더비 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내 경험을 예로 들면, 내 작품을 처음으로 예술로 평가해 준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 리처드 마셜(Richard Marshall) 씨였습니다. 그는 전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이자 로버트 메이플소프,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등을 널리 알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내 그림이 처음 일본 밖에서 전시된 곳은 뉴욕 현대미술 갤러리 ‘피처’였는데, 그 기회를 준 사람도 역시 이미 세상을 떠난 오너 허드슨(Hudson) 씨였습니다. 또 성인용 만화 영어 번역판 출판에 힘써 준 사람은 미국의 카리스마 넘치는 북 디자이너 칩 키드(Chip Kidd) 씨로, 그는 지금도 건재하며 친구로서 교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내 작품이 국경을 넘어서는 과정에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고, 그들 모두는 오픈리 게이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지금의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과 동시에, 늘 게이임을 공개하며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기를 바랍니다.
Q34. 야토 타모츠의 유산과 동아시아 사진 예술: 미군 출신으로서 특수 계급의 위치에 있었던 야토 타모츠의 애인 메레디스 웨더비는 롯폰기의 서양식 저택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 공간을 배경 삼아, 야토 타모츠는 판단 유예의 특권적 영역에서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와 동료들이 극우로 폭주한 1970년 11월 25일 이후, 야토 타모츠는 메레디스 웨더비에게 버림받았죠. (1970년에서 1971년 사이, 웨더비가 새로운 애인을 선택하면서 그와의 동거가 끝나게 되었고, 야토는 웨더비 저택을 나와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에서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심장에 문제가 생겼고... 안타깝게도 1973년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죠.
하지만, 야토 타모츠가 창출한 게이 남성미의 시각 언어는 오늘날 동아시아 게이 문화 코드 속에서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만, 한국의 게이들이 그 언어를 수용하고 수정하며 새로운 게이 남성미의 언어를 개척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물론 그들이 야토 타모츠에게 직접 영향을 받은 게 아니고, 타가메 겐고로의 예술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동아시아 각 지역의 베어 게이씬은 타가메 겐고로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야토 타모츠를 능가하는 동아시아의 게이 사진가―게이 섹슈얼리티를 탐구하는―는 아직도 찾기 어렵습니다. 참 애석한 일이죠. 필적할 수 있었던 이는, 렌 항(Ren Hang, 1987-2017) 한 명이었는데, 역시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왜 아직도 직설적으로 게이 섹슈얼리티를 탐구하는 아시아의 문제적 사진가를 만나기 어려울까요?
A. 앞서 말했듯이, 일본에서는 사회적 지위나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면서 게이를 공개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게이 예술가가 세상에 나오지 못한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이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는 작가가 있고, 속으로는 그것을 평가하는 큐레이터나 평론가가 있어도, 그들이 클로짓 게이인 이상 공개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젊고 재능 있는 게이 작가를 도와주는 것보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우선인 것이죠.
야토 타모츠의 경우도, 웨더비 씨에게 버림받은 뒤에 사회적 지위나 문화적 영향력이 있는 누군가가 후원자로 나섰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닏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게이임을 공개하고, 게이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표현을 거리낌 없이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작가든 평론가든 일본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작가든, 작가를 다루는 라이터나 편집자든, 게이임을 공개하고 활동하는 젊은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확 늘었어요. 그들은 내 작품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며, 동세대의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 중에도 오픈리 게이가 있을 수 있겠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그들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면, 상황은 크게 변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Q35. 퀴어한 주변부 시각과 남성성 재구성: 이성애자 중심 사회에서 오랫동안 ‘진정한 남자다움’은 동성애자나 젠더비순응 주체를 배제한 채 규정돼 왔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작품 속 세계에서는 오히려 게이 남성이 주체가 되고, 전통적 남성성(힘과 권위의 상징들)을 다시 휘어잡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주변화된 퀴어 주체의 시각에서 남성성을 재구성하거나 재탈환하는 길을 꾸준히 탐구해왔다는 해석도 가능할 듯합니다.
이런 관점에 대해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생님 자신의 예술이 남성성을 예찬하면서도 그것을 내파하며 새롭게 재규정해왔다는 자의식을 갖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A. 나에게 남성성이란 어디까지나 에로틱하게 바라보는 대상입니다. 그 찬미도, 파괴도, 재구성도, 그것이 내게 에로틱하게 느껴지는지가 전부입니다. 의도적으로 남성성을 재정의하려는 목표는 없어요. 남성성에 대한 비평적 시각은 그리면서 항상 마음 한구석에 의식하지만, 그것이 표현의 주목적이 되지는 않으며, 어디까지나 작품을 풍부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Q36. ‘수치’를 ‘긍지’로 바꾸는 예술: 전에 <톰오브핀란드>에 관한 대담에서, 선생님께서 그의 생애와 예술이 동성애를 국가적 ‘수치’에서 ‘긍지’로 승화시킨 면을 감탄스럽게 보셨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핀란드 정부가 <톰오브핀란드>를 기념하는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영화로 제작한 일 등을 예로 들며, 한 예술가가 금기와 편견을 뒤집은 점에 공감을 표하셨죠. 저는 언젠가 타가메겐고로뮤지엄이 설립되는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미래상을 그려보시는지 궁금합니다.
A. 나 자신이나 내 작품의 미래상에 대해서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대로 계속 그리고 싶을 뿐이니까요.
_ 동서양 ‘마초’ 게이 아트의 맥락
Q37. ‘일본의 톰오브핀란드’라는 별칭에 대해: 서구의 게이 아트 거장인 ‘톰오브핀란드’(토우코 라크소넨)와 선생님의 이름이 자주 함께 언급되곤 합니다. 외국 언론에서는 선생님을 “일본의 톰오브핀란드”라 부르기도 하지만, 정작 선생님이나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두 예술가를 쉽사리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토우코 라크소넨은 전후 서구의 맥락에서 바이커, 제복 경찰, 군인, 선원 등 상징적 마초 캐릭터들을 호모에로틱(homoerotic)한 아이콘으로 탈바꿈시켰는데요, 이러한 그의 작업과 선생님의 작품 세계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보시나요?
토우코 라크소넨을 분석하자면, 다음을 언급하게 됩니다:
전쟁과 게이 공동체의 관계: 군대/군인 코드, 이상화된 육체에 대한 헬레니즘적 탐닉: 그리스 로마 전통에 대한 판타지, 올림픽의 이상 + 나치의 이상에 의한 건강한 육체의 정치화, 독일군의 제복 미학에 빠졌던 마스든 하틀리 등의 전례, 1930년대 에로틱 남성 누드 미학화(GEORGE PLATT LYNES 등), 1956/1957년경 피지크 픽토리얼과 게이 문화의 결합: 가죽과 데님 페티시의 양식화가 이뤄짐, 1969년 6월의 스톤월 폭동 이후 사회 변화가 추진되고, 1973년 게이 에로틱 이미지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 완화됨. (토우코 라크소넨은 1973년 전업 작가로 변신했고, 함부르크에서 첫 번째 전시를 개최했죠.) 1977년 빌리지 피플의 등장으로 디스코가 국제적으로 유행하고 대중문화가 게이 하위문화의 근육 미학을 차용하기 시작하자, 1979년 변화를 감지한 토우코 라크소넨은 동료(Durk Dehner)와 함께 톰오브핀란드컴퍼니(Tom of Finland Company)를 설립하고 저작권 사수에 나섰습니다. 1980년대 에이즈 대위기 시대가 도래하자, 1984년 토우코 라크소넨은 호모에로틱 아트의 성과를 수집하고 보존하기 위해 톰오브핀란드재단(Tom of Finland Foundation)을 설립하고 태세를 전환했죠.
토우코 라크소넨과 타가메 겐고로의 특별한 점은, 게이를 차별-탄압해온 남성성을 미학화해 옷으로 둘러 입음으로써, 극강의 남성성을 퀴어화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작가님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A. 마초한 게이 이미지를 만들어 세상에 알려지고, 게이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작가라는 설명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에게 톰오브핀란드는, 사회의 이성애 규범에 아부하지 않는 게이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을 지키며, 자신이 느끼는 에로티시즘에 충실한 작품을 그리고, 액티비즘에도 참여한, 표현자로서도 게이 남성의 삶의 방식으로서도 존경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그와 나란히 불리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죠.
Q38. 동서양 ‘마초’ 게이 아트의 맥락: 선생님의 작품은 흔히 서구의 <톰오브핀란드>로 대표되는 마초 게이 아트(Macho Gay Art) 계보와 함께 이야기되곤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토착적으로 ‘바라’라 불리던 게이 미술 문화 코드가 존재했고, 서구와는 다른 맥락에서 근육질 남성상이 그려져 왔습니다. 서구 바이커 문화의 마초 예술과 일본 바라 문화, 그리고 그 영향 아래 등장한 선생님 세대의 작품들 사이에는 어떤 맥락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동서양의 관점을 모두 체험한 예술가로서, 이러한 하이퍼-마스큘린 게이 아트의 보편성과 문화적 특수성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A. 일본 미술사적으로는 남성 누드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전통이 없습니다. 그것이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은 메이지 시대 이후이며, 그마저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또 일본의 게이 아트에 ‘바라’라는 문화 코드가 있었다는 것도 오류입니다. 이는 인터넷 초기 게시판(구체적으로 2채널 등)에서 동성애 관련 게시판을 은어로 ‘BARA’라 부른 것이(아마 이성애자에게 가장 유명했던 게이 잡지 <바라조쿠>에서 유래했겠죠), 마치 ‘야오이’나 ‘BL’과 짝을 이루는 용어인 것처럼 해외(아마 영어권) 유저들이 오해한 것이 시작입니다. 최근에는 이것이 일본에 역수입된 양상이지만, 인터넷 이전부터 2020년 전후 게이 잡지 종말까지, 일본 국내에서 게이 아트를 ‘바라’라고 부른 습관은 전혀 없었어요. 이러한 경위와 ‘BARA’라는 명칭이 지닌 문제점은 <일본의 게이 에로틱 아트 vol.3>의 “일본의 게이 에로틱 아트사—게이 잡지 전성기 이후의 새로운 흐름”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마초’ 게이 아트 역사를 돌아보면, 먼저 1960년대 초반에 서양 미술의 남성 누드와, 우키요에를 뿌리로 한 메이지-2차대전 직후의 삽화 미술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등장합니다. 동시에 톰오브핀란드나 조지 퀜틴스 같은 미국 잡지의 게이 아트가 수입됩니다. 이후 일본 작가들에게도 그 영향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런 작가들이 1970년대 <바라조쿠>, <사부>, <아돈> 같은 초기 게이 잡지를 받쳐주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여기에 만화의 영향이 더해졌는데, 초기에는 데포르메가 심하지 않은 청년 만화풍이 주류였어요.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는 더 데포르메가 강한 소년 만화풍,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풍이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훗날 해외에서 ‘BARA’라 불리게 된 작품 유형의 뿌리는 여기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게임 그래픽의 영향이 더해지며, 서양 미술적 리얼리즘은 점차 옅어졌어요.
하지만 컴퓨터 드로잉이 일반화되면서, 아날로그 회화에서는 상당한 기술과 훈련이 필요했던 균일한 채색과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이 쉽게 구현됐습니다. 그 결과, 데포르메된 만화적 형태를 사실적인 명암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것이 현재 ‘BARA’라 불리는 게이 아트의 주류 스타일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퍼 마스큘린한 이미지는 현실에서보다 만화나 게임 속 과장된 형태에 가까워졌고, 애니메이션·게임이 국경을 넘어 수용된 것처럼 이 스타일도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동서양 두 스타일의 하이브리드일지도 모르겠어요.
Q39. 패전 국가들의 남성성 비교: 일본뿐 아니라 전후 독일이나 이탈리아, 그리고 핀란드처럼 패전이나 전쟁으로 인한 상실을 겪은 국가들의 남성성에 공통된 현상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죠.) 전쟁에서 패한 사회의 남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할을 재정립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에 직면합니다. 혹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작품의 캐릭터나 테마를 구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술가로서 전쟁과 패배가 남성에게 남기는 심리적 상처나 변화에 관심을 두셨다면, 작품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민주화 이전의 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성들이 끝없이 실패하고 좌절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또 그 울분을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미학화해는 패턴을 뵀던 점에 주목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남성들에겐 섹시한 근육이 허락되지 않았죠. 그런데 놀랍게도, 민주화 혁명 이후, 한국의 문화 컨텐츠에서, 남성 주인공들은 점차 섹슈얼리티 표현력과 함께 자신감을 회복합니다.)
지난 10여 년 사이, 동아시아의 게이 남성들은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통해, 남성미를 과시하고 향유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습니다. 일단 근육량의 변화가 엄청났습니다. 그리고 온리팬즈 연속체를 통해 한중일대만 콜라보 작품들도 나오고 있죠. 이런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변화가 예술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을까요?
A. 군대나 전쟁이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패전은 거세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세된 남성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나올 수도 있겠죠.
전쟁에 국한하지 않고, 승자와 패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SM 문맥에서 이야기 속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인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승자인 미군 장교가 패자인 일본군 장교에게 성적으로 끌려 그를 제압하고 굴복시키려 하는 장편 <그대 아는가 남녘의 옥>입니다. 실제 전쟁과 마찬가지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장면을 메타포로서 명시적으로 그렸습니다. 이 밖에도, 호모소셜 세계에 호모섹슈얼 요소가 나타나면서 생기는 갈등, 동성애나 사도마조히즘의 자기 수용이라는 주제, 폭력 행위나 존엄 훼손을 그리는 시점의 사도마조히즘적 반전 등, 남성성을 축으로 한 SM이라는 점에서 가장 의욕적으로 다룬 작품일지도 모르겠네요.
_ 미래 전망
Q40. 타가메 겐고로의 위치와 미래 전망: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이야기한 역사적·이론적 맥락 속에서 타가메 겐고로라는 예술가의 위치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전후 일본의 남성성 담론, 퀴어 하위주체의 관점, 그리고 세계적인 게이 아트 흐름을 종합해볼 때, 선생님께서는 그 거대한 퍼즐 속에서 늘 새로운 도전에 나서며 어떤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역사는 타가메 겐고로의 예술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하게 될까요? 미래 세대는 이 자산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하게 될까요?
A. 앞서 말했듯, 후대에서의 내 평가는 다음 세대의 다른 사람들이 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만약 톰오브핀란드의 영향 아래 로버트 메이플소프나 브루스 웨버가 나타난 것처럼, 내 작품에 영향을 받은 파인아트나 상업 아트 작가가 등장해 그 작품이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일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Q: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_ 작가 소개
타가메 겐고로(田亀源五郎) 1964년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출생.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의 게이 잡지에 만화와 소설을 발표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1994년 첫 단행본 <노리개>를 출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 게이 만화 잡지 <지맨(G-men)>을 공동 창간한 이후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며,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게이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대표작으로 게이 커뮤니티의 삶을 그린 <은의 꽃>, <노리개> 등 성인만화 작품과, 일본 사회의 동성애 이슈를 다룬 <아우의 남편>(2014), <우리들의 색>(2018) 등이 있다. 현재 회화, 일러스트, 사진 등 순수미술 분야로도 활동 영역을 확장하여 국제적인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_ 편집자 알림
※ 이 인터뷰는 2025년 7월 이메일 서면으로 진행됐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임근준(현대미술사학자). 답변은 일본어로 작성됐으며, 한국어 번역과 편집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았다.